외화벌이 주역 미8 군가수들 349. [김명환의 뮤직톡톡] 한류의 시작

[김명환의 뮤직톡] 한류의 시작 외화벌이의 주역 미8군 가수들

2018-12-07

韓国한국 최초의 걸그룹인 김시스타즈.이번에는 한국 가요사에서 미군부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거기에 출연한 가수들의 연대기도 추적해 볼까.

몇 년 전 용산 미8군이 주최하는 재즈페스티벌 공연을 기획하고 연주했던 일이 생각난다. 우선 용산에서 날아온 30여 장의 영어공연 계약서가 나를 감동시키고 주눅들게 했다. 공연에 관한 사소한 것까지 낱낱이 기록돼 있었다. 국내 공연기획계와는 사뭇 달랐다. 솔직히 부러웠다. 그만큼 뮤지션을 배려했다.

공연은 넓은 미식축구장에서 축제처럼 펼쳐졌다. 와인, 먹을거리도 즐비했다. 흑인과 백인군, 그리고 그들의 초대로 들어온 한국인 등이 자유롭게 흩어져 각자의 방식으로 음악을 감상했다.

나는 그날 음악을 통해 성격 차이를 느꼈다. 텍사스 블루스를 연주할 때는 백인들의 기립과 환호가 들렸다. 반면 뉴올리언스 딕실랜드 음악을 연주할 때는 흑인들의 춤이 눈길을 끌었다.

191950년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주역이자 세계의 경찰이 된 미군. 이들이 주둔하는 곳이면 항상 USO(United Service Organization미군위문협회) 공연단이 와서 위문 공연을 했다. 루이 암스트롱이나 냇 킹콜 같은 전설의 가수들도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부대를 찾았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 미군의 지위는 높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강대함 그 자체였다.

노란 셔츠의 남자를 부른 한명숙은 윤복희와 함께 미8군 무대에서 활약한 여전사급 가수다. 이 노래는 국내뿐 아니라 동남아 중국 일본 등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심지어 프랑스 샹송가수 이베트 지로가 내한했을 때도 이 노래를 한국어로 부른 적도 있다.

“방금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가수” 한명숙은 정말 그런 가수였다 왜 노란 셔츠일까? 작사 작곡가 송석우는 노란 셔츠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멜로디가 떠오르는 순간 노란색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술회했다. 노란색을 제외하고 파랑 빨강 하얀색을 넣어 부르면 금방 맛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노란색이 가장 잘 어울리면, 아니 ‘노란색’이 곡의 뉘앙스를 더 잘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도 곧 알게 될 것이다.

한국 최초의 여성 중창단 겸 걸그룹은 누구일까. 김시스터즈다 3명으로 구성된 중창단의 2명은 김혜선 이난영 부부의 딸이고 나머지 1명은 이난영의 형으로 드러머 이복룡의 딸이다.

이들은 노래 실력뿐 아니라 수십 가지 악기를 구사한다. 그래서 한국 미8군 쇼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이를 본 한 미국인 기획자의 눈에 띄어 1959년 미국에 진출하게 되면서 한국 가수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먼 미국에 1년 넘게 살면서 고국이 그리워/아침저녁으로 점심상에 쇠고기 스택 맛있다고 자랑해도/한국 배추김치를 깍두기보다 못하다. 김 씨스터즈의 ‘김치 깍두기’라는 개인적인 노래를 좋아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지금 어떤 걸그룹도 만들어 낼 수 없는 환상적인 하모니를 들려준다.

이 밖에 미니스커트 돌풍을 일으킨 윤복희를 비롯해 현미 패티 김 최희준 김상국 신중현과 어드포.사실상 1960년대를 주름잡았던 가수들은 미8군 쇼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빌보드에 진출한 아이돌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그에 따른 경제효과까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수출, 즉 외화벌이의 주역은 공산품이 아니라 미8군 가수였다. 미군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달러로 연주료를 받는데 그 금액이 가발을 수출해 번 외화보다 많았다고 한다.

이처럼 한국 가요사는 미국 선교사의 찬송가, 그리고 미군부대 무대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을 제외하고는 한국 가요사를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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