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황금씨족’ 과 신라 골품제 와의 연관성!

황금씨족은 칭기즈칸의 후손을 일컫는 말을 뜻한다. 즉 칭기즈칸 혈통인 ‘보르지긴 가문’ 중 그 직계 후손에 한정된다고 한다.

칭기즈 칸의 부계 혈통으로 이어지는 항김씨족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농경민족보다 실제로는 유목민족이 혈통을 중시한다고 한다. 사실 칭기즈 칸이 멸망한 상황에서도 저는 몽골의 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템진(칭기즈 칸)의 능력도 뛰어났지만,

템진은 흰 뼈의 씨족이었다

그가 몽골의 명문 ‘흰골씨족’이자 템진의 라이벌이었던 ‘잠카’가 ‘티노스족 학살’과 같은 잔혹행위를 한 이유는

칭기즈 칸 정복 활동

‘잠카’는 ‘템진'(칭기즈 칸)보다 어떤 측면에서는 능력이 좋았음에도 ‘흑골씨족’이었기 때문에 ‘몽골의 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잔인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 1. 신라 골품제에 영향을 미쳤던 기마유목민의 전통 신라가 흉노와 같은 기마민족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바로 ‘골품제’이다.

사실 유목민이 농경민보다 혈연을 가장 중시하고 혈연은 모든 ‘사회적 연줄’ 등을 뛰어넘는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한다. 즉 유목민 사회의 혈통 집단인 부족은 정치·사회·경제·군사 등 모든 유목민의 삶을 망라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유목민이 혈통을 중시하고

신라가 골품을 그렇게 신봉한 이유도 그들이 어쩌면 ‘북방기마민족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골품제도’를 멸망시킬 때까지 유지했던 것 같다.

신라의 기마인물형 토기

칭기즈 칸이 세계를 통일한 뒤에는 아예 그의 혈통을 누구도 노릴 수 없다는 의미에서 황금씨족이라는 족속을 만들었고, 이는 몽골제국이 사라진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일로부터 기마민족의 영향을 받은 신라

성골과 진골을 만든 신라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리고 둘 다 황금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그리고 칭기즈칸은 흰 뼈·잠카는 검은 뼈 등을 운운하며·성골·진골처럼 신성한 뼈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2. 쿠빌라이 손충선왕(고려왕실)은 황금씨족이었나? 황금씨족은 모계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직 부계로만 이어졌다고 한다.황금씨족의 상징이 새겨진 반지그래서 원래 쿠빌라이의 외손자인 충선왕과 그 후손인 고려왕실을 황금씨족으로 오해하기도 하는데요.쿠빌라이의 외손 충선왕황금씨족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몽골 왕가의 유력자인 개식이 되어 몽골 황제를 선학하는 크릴타이에 참여할 수는 있었다. ‘개식’은 몽골어로 ‘축복받았다, 은혜를 받았다’ 또는 ‘신성한’을 뜻한다. 1203년 칭기즈 칸이 창설했다고 한다.크릴타이세서 칸에 선출되는 템틴창설 당시에는 불과 100여 명으로 시작해 초기에는 1000여 명 정도였다고 하나 전성기에는 1만여 명이나 됐다고 한다.황금 씨족의 계보원나라에서 고려왕은 순위가 6위까지 오르는 등 안이한 왕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몽골 공주가 고려로 시집간 뒤에는 고려에 파견된 달가치가 함부로 고려를 멸시하거나 과도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3. 칭기즈 칸 이후 성립된 황금씨족의 전설 몽골 이후 수많은 유목세계 영웅들은 자신이 황금씨족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에 콤플렉스를 느끼고,티무르는 황금 씨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칸이 될 수 없었다굳이 황금씨족 여자들과 결혼해 어떻게든 칭기즈칸 황금씨족과의 연관성을 만들려고 했다.(대표적인 인물이 티무르) 티무르의 경우 원나라 멸망 이후 ‘몽골계’로서는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인물이었으나 칭기즈 칸의 부계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칸’이라고 자처할 수 없었다.황금 씨족이 아니면 칸을 칭할 수 없었다티무르의 어머니는 황금씨족이었지만 결코 그는 황금씨족이 될 수 없었다.몽골 가계를 내세운 무굴 모친이 몽골계였다.이는 인도의 무굴 제국에도 해당했는데 무굴은 몽골이라는 뜻이었지만 무굴 황제 역시 칸이라는 칭호를 쓰지 못했다.칭기즈칸의 전국 옥새를 차지한 청태종 홍태사청나라 황제 역시 황금씨족 여성(동방삼왕가, 즉 카사르 우루스, 칭기즈 칸의 막내아들가)을 황후로 맞아 몽골 칸과 중국 황제를 겸임하는 구조(이중제국)로 나라를 운영했다.준갈을 정복하는 간륨제청나라의 경우는 황금씨족이 아닌 만주족이 ‘간(菅)’을 칭하는 것이 참칭으로 볼 여지가 있다. 그런데 중갈부 등 워낙 막강한 유목민족을 다 쓸어버려서…4. 영토는 넓었지만… 실제로 봉건제도(지방자치)였던 원나라 몽골족은 사실 인원이 너무 적어서 사실 중국인, 일명 남송인(옛 남송인)을 생각보다 철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고 한다.칼을 못 쓰게 해서 생긴 도삭면도삭면의 예에서 보듯 중국인들은 몽골 지배기의 식칼도 10가구가 다 쓰고 한족에게 초야권도 요구했다는데(확실하지 않다).현재 도삭면은 산시성의 대표적인 음식이다.실제로 몽골족은 강력하게 중국인을 통제할 수 있는 인원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 남부 강남(옛 남송 지역)의 경우 중국인 부자층이 사실상 향촌자치 조직을 이끌었다. 이어 이들은 황제만이 치를 수 있는 과거시험을 열었다고 한다. 하지만 몽골은 이런 (방탕한) 행동을 시끄럽게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사실 일일이 통제하기 어려웠다)남송을 정벌한 쿠빌라이지만 인구가 너무 적어 알려진 것 이상으로 강력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이 때문에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원나라에 따라 ‘향촌의 수장’에 있던 중국 한족은 몽골이 멸망해 갈 때 몽골에 충성하다 죽어간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친일파 같은 놈들이니까) 이렇게 원나라에 충성했던 중국인들 중 일부는 심지어 몽골족과 함께 몽골 초원으로 도망쳐 현대 몽골인의 조상 중 한 명이 됐다고 한다. 어쨌든 남중국(옛 남송지역)은 사실상 한족 신사층을 중심으로 자치를 보장하고 방치했다고 한다. 5. 황금씨족의 멸족(사리지는 칭기즈 칸의 영광), 사실 청나라 때 이미 황금씨족을 자신의 성과 이름(보르지긴)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칭기즈칸의 후예 황금씨족그래도 자신이 황금씨족임이 자랑스러워 몽골의 왕은 계속 황금씨족에서 나왔다. (담딘 수흐바타르, 뎀치그돈 로브 등) 그러나 몽골이 공산혁명에 휩싸이면서 황금씨족은…사라진다! 몽골의 스탈린으로 불리던 아내 이발상은 1895년 미혼모 어머니의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고 한다. 1921년 몽골 내 주둔 중이던 중국군과 러시아 반혁명 잔당인 백군의 응게른 남작 군대를 몽골에서 몰아내고보쿠도칸의 궁전종교지도자 겸 국왕 보쿠드 칸(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같은 존재)을 복위시켜 몽골 독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황금씨족을 멸망시킨 처이병위아내 이발산은 두 살 위인 수흐바타르 장군과 소련의 도움으로 외몽골 독립을 이뤘으나 수흐바타르는 만 30세에 결핵으로 사망하고 이후 몽골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보쿠드 칸도 1924년 사망한다.몽골의 스탈린 차이 발상’복드 칸’ 사망 이후 1924년 몽골이 공화국이 된 이후 ‘아내의 발상과 스탈린’은 ‘티베트 불교 박해’ 등을 포함한 강력한 공산주의 정책을 밀어붙인다.복2칸의 모습19371939년에 행해진 대규모 숙청과 티베트 불교 말살을 통해 몽골의 겐덴과 아난딘 아무르 전 총리 등 정치인과 불교 신자 및 승려를 처형했다. (심지어 공산혁명 원로까지) 티베트 이기려는 지식인층은 총살·비지식인층은 시베리아 수용소, 젊은이들은 재교화 후 돌려보냈다.이 과정에서 18,000명에 달하는 티베트 승려가 사망한다. 또한 746개 사찰이 파괴되고 수많은 불상과 조형물이 녹아 무기공장에 재료로 보내진다. 이 기간에 사망한 사람의 수는 3만~3만 5천 명 정도였으므로 전체 인구의 4%를 즉이었다.이제 사라진 황금씨족당연히 봉건주의 잔재인 ‘황금씨족’ 역시 죽음을 당하거나·자신이 ‘황금씨족’이라고 해도 더 이상 밝힐 수도 없고·계보도 불타 증명할 길이 없어졌다.사라진 황금씨족 유물처이발상은 비록 칭기즈 칸을 무시하고 몽골 문자를 버렸다는 이유로 몽골 민족주의자에게는 욕을 먹지만 그래도 외몽골의 소련 편입 반대와 몽골 독립은 지킨 민족주의자였다. 아내의 발상이 스탈린의 뜻을 거역했다면 몽골은 소련에 편입됐을 것이다. ■좋아요는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처이발상은 비록 칭기즈 칸을 무시하고 몽골 문자를 버렸다는 이유로 몽골 민족주의자에게는 욕을 먹지만 그래도 외몽골의 소련 편입 반대와 몽골 독립은 지킨 민족주의자였다. 아내의 발상이 스탈린의 뜻을 거역했다면 몽골은 소련에 편입됐을 것이다. ■좋아요는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