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 서기 9C에 동아시아 바다를 장악하고 호령한 해상왕 장보고는 실존했던 인물이지만 그의 삶과 존재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인터넷에는 바람처럼 살아간 장보고의 생애와 해상무역활동에 관한 자료와 그림, 글, 청해진의 중심이었던 장도 등에 대한 사진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왜 완도와 그 부속섬인 장도가 9C 동아시아 해상패권을 장악한 청해진(淸海鎭)이 설치되었는지에 대한 지리적 설명은 없습니다. 이 글은 청해진 본진이 위치한 완도와 장도 주변의 지리적 특징에 대해 설명합니다.
- 장도의 지리: 아래는 장도의 전경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장도는 전복 껍질을 뒤집은 것처럼 생겼습니다. 장도는 남북 392m, 동서 390m 정도의 작은 규모의 섬입니다.장도와 마주보고 있는 완도 장좌리 일대 해안의 지형적 상황을 보면 장도는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통일신라시대에도 썰물 때 완도 본도와 연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장도 건너편 장좌리 해안이 장도 방향으로 길게 돌출된 독특한 지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조류의 작용으로 하천이 운반해 온 토사가 장도 쪽으로 퇴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저런 해안선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장도는 썰물 때 완도와 연결됩니다.(사진출처) https://www.wando.go.kr/tour/attraction/main_tour/jangdo_cheonghaejin
(1) 장좌리~장도를 잇는 목교 : 현재는 물때와 상관없이 장도를 오갈 수 있습니다.
- 장도와 완도의 지리: 장도의 서쪽에 위치한 완도의 중심으로 해발 645m가 넘는 험준한 산왕산이 위치하며, 장도 쪽에 형성된 골짜기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선상지가 발달하였습니다. 선상지란 산지와 평지(바다, 호수)가 만나는 계곡 입구에 하천이 운반해 온 토사가 쌓여 형성된 부채꼴 지형입니다.서남해의 다도해 섬들은 대부분 산지가 많고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평지(공간)가 좁습니다. 청해진 본영이 설치된 장도 건너편 해안에는 대야리-장좌리-죽청리 마을이 위치한 상대적으로 큰 규모의 선상지가 발달하여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규모가 작은 장도에 본영을 설치하고 주변 지역에 청해진과 관련된 군인, 민간인, 상인들이 활동하고 거주할 수 있는 마을과 대장간, 공방 등의 시설이 들어설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대야리-장좌리-죽청리에 발달한 선상지가 이러한 역할을 한 것입니다. 만약 장도 건너편 장좌리 일대가 산지가 바다와 만나 형성된 급경사의 해식애와 같은 지형이 분포하는 해안이었다면 장보고는 장도에 청해진 본영을 설치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1) 청해진의 주요 생활공간 선상지: 북쪽의 대야리-장좌리-죽청리에서는 청해진과 관련하여 동아시아 해상교류를 알리는 중국의 자기, 토기 등 다양한 유물과 유적이 발굴되었습니다. 장보고 기념관은 죽청리 야산 언덕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산이 많고 평지가 적은 완도에서 장도 건너편 해안의 선상지가 장보고 시절 청해진 사람들의 주요 거주지이자 활동 무대였음을 증명해 줍니다.
2) 화산활동의 추억을 간직한 완도의 암석 : 중생대 백악기 완도를 비롯한 한국 서남해안은 현재 일본처럼 화산, 지진활동이 활발했던 마을입니다. 완도는 마그마(돌국=돌 녹은 물)가 지표로 분출하면서 형성된 무등산 용암, 응회암 등의 화산암과 지하로 관입하여 형성된 미문상 화강암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그러나 이곳에서 암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산왕산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큰 규모의 선상지가 발달하고 장도가 청해진 본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생활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지질도를 보면 해안에 노란색으로 표시된 충적지가 대야리-장좌리-죽청리에 발달한 선상지입니다.
3) 사질 갯벌과 선상지: 갯벌은 조차 큰 해안에서 조류에 의해 육지에서 운반되어 온 토사가 퇴적되어 형성되는 지형이기 때문에 서해와 완도가 위치한 서남해에 넓게 발달하였습니다. 장도와 맞은편 대야리-장좌리-죽청리로 이어지는 선상지가 분포하는 해안에 갯벌이 넓게 발달하였습니다.선상지는 하천 상류 계곡 입구에 형성되는 퇴적 평야로 주로 입자가 큰 자갈과 토사가 퇴적됩니다. 장도 건너편 완도에 선상지를 만든 하천이 운반해 온 자갈, 토사가 바다 조류에 의해 운반되고 장도 주변에 사질 갯벌이 형성되었습니다. 한강, 금강처럼 규모가 큰 강은 바다에 많은 미립물질을 공급하여 규모가 큰 진흙갯벌이 형성되는데 규모가 작은 완도의 하천은 주로 자갈과 모래를 공급합니다.표현을 사질 갯벌이라고 했는데 장도 남해안의 갯벌은 언뜻 보면 자갈 해안처럼 보일 정도로 큰 자갈이 많고 자갈 사이에 모래가 쌓여 있습니다.
(1) 사질갯벌은 장도와 완도를 잇는 교통로다! : 현재 장도는 장좌리와 연결된 목교가 있어 밀물 때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목교 왼쪽을 보면 썰물 때 트럭, 경운기 등이 지나던 바퀴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사질 갯벌이기 때문에 단단하고 발이 빠지지 않기 때문에 썰물이 되면 사람, 우마차, 자동차 통행에 문제는 없습니다. 만약 진흙이 쌓인 갯벌이라면 썰물이 되어도 사람의 통행이 어려웠을 것입니다.청해진 설치 당시에도 썰물 때 사질 갯벌을 통해 완도와 장도는 사람과 대량의 물자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썰물 때 육지가 되는 장도는 적의 공격에 취약할 수도 있지만 장도에 토성이나 해안에 목책과 같은 방어시설을 구축해 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주변 갯벌 : 사진은 장도 건너편 대야리-장좌리로 이어지는 해안에 발달한 갯벌의 일부를 촬영한 것입니다. 마을에서 가까운 바닷가에 자갈 갯벌, 중간에 자갈과 모래가 섞인 갯벌, 바닷가에서 먼 곳은 모래와 진흙이 섞인 상대적으로 깨끗한 갯벌이 발달했습니다. 대야리-장좌리-죽청리로 이어지는 선상지를 만든 하천이 운반해 온 토사를 바다 조류가 운반하는 과정에서 무거운 돌은 인근 해변으로, 상대적으로 가벼운 진흙은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안쪽까지 운반한 결과입니다.
2. 청해진을 완도에 위치시킨 지리의 힘: 왼쪽 그림은 한중일 3국 주변을 흐르는 해류도이고 오른쪽 그림은 장보고 활동 당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무역로입니다. 적도에서 올라오는 흑조 해류가 제주 남쪽 먼 바다에서 갈라져 대마도 해류가 되고 대마도 해류의 일부가 제주 서쪽 바다를 흐르는 제주 해류(JWC)를 형성합니다. 제주 해류는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우리나라 서해안을 따라 중국의 요동반도에 이르는 한국 연안류(KCC)가 되고, 다른 하나는 서해 중앙을 따라 발해만까지 흐르는 황해난류(YSWC)가 됩니다. 발해만에서 중국 동안을 따라 중국 연안류(CCC)가 남쪽으로 흐르고 있습니다.장보고시대 한중일 3국을 잇는 무역로가 해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보고가 활약하던 시절의 배는 무동력선으로 바람, 해류의 흐름에 의지해 항해해야 했습니다. 배에 필요한 식량, 식수, 각종 물자를 원활하게 공급받기 위해서는 육지와 가까운 연안 항로를 이용해야 했습니다. 해류도에는 중국과 한국의 연안을 따라 해류가 흐르고 있어 자연스럽게 양국 연안을 따라 무역로가 형성된 것입니다.장보고가 활동할 당시에는 항해술의 한계로 해류와 바람을 거스른 항해는 위험 부담이 컸기 때문에 대부분 연안 항로가 이용되었습니다. 중국-일본 직항 항로가 있었지만 원양 항로로 흑조 해류를 거슬러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이용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청해진 경유로 한국의 남해안 연안 항로를 따라 일본까지 가는 노선이 주로 이용된 것입니다.서남해에 위치한 완도는 중국 항로와 일본 항로의 교차로에 해당하며, 중국 영주를 통해 아라비아까지 이어지는 해로(해상 실크로드)를 잇는 동아시아 해상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또한 다도해의 많은 섬으로 둘러싸여 태풍과 같은 강한 바람과 파도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리적 조건을 갖춘 곳입니다.
3. 장도 청해진 본영의 지리: 아래 지도는 청해진 본영이 있던 장도의 지형적 특징을 등고선으로 자세히 묘사한 것입니다. 동쪽, 남쪽, 북쪽 사면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고 서쪽은 상대적으로 경사가 완만합니다. 장도는 동쪽, 남쪽, 북쪽이 높고 서쪽으로 낮아지는 지형을 이루며 정상은 평탄합니다. 감시 초소는 높은 동쪽에, 청해진 본영을 구성하는 건물은 고도가 낮아지는 서쪽 사면에 세워졌습니다. 장보고는 장도의 이러한 지형적 특징을 활용하여 성을 쌓고 청해진 본영을 이곳에 마련한 것입니다.급경사를 이루는 장도의 동서남북과 주변 바다가 장도를 천연 요새로 만들었습니다. 청해진 본영이 위치한 장도는 썰물 때 적이 공격하기 어렵고 밀물이 되면 섬 안의 섬이 되어 공략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그러나 장도는 전체 면적이 38,000평으로 규모가 작아 실제로 섬에 거주했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청해진과 관련된 사람의 대부분은 장도 건너편 대야리-장좌리-죽청리로 이어지는 해안가 선상지에 집단 거주했을 것입니다.
(1) 망루와 같은 지형: 아래 사진은 위 사진 ③번지에서 나가시마 동쪽과 남쪽 바다를 촬영한 사진입니다. 신지대교는 완도와 신지도, 장보고대교는 고금도와 신지도를 잇는 시도교입니다. 장도토성의 동쪽 성벽에 오르면 동서남북의 모든 방향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장도가 청해진 본영을 장도에 설치한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장도는 주변의 다도해와 섬 사이의 수로를 운항하는 배를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망루와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뷰가 좋아요.^^
- 청해진 본영(성)의 구조: 장도의 청해진 본영은 고대 성곽의 건축방식인 판축공법으로 쌓은 토성으로 전체 길이 890m, 높이 2.8m입니다. 판축공법은 흙이나 모래, 자갈 등을 찐 떡처럼 쌓아 성벽을 쌓는 것입니다. 청해진 본영 성벽의 판축은 총 18층(층)으로 견고하게 지었습니다.성벽을 공격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치(治)를 설치하였다. 치는 아래 사진과 같이 성벽 일부를 성 밖으로 튀어나오도록 쌓아올린 한국의 성에만 있는 독특한 구조입니다.
(1) ㄷ자형 구조물(옹성): 청해진 본영의 주요 출입구이며, 제1방어선인 외성문 앞에 ㄷ자형 판축제가 축조되어 있습니다. 제방의 구조로 보아 적의 침입으로부터 외성문을 보호하는 옹성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이한 점은 ㄷ자형 제방 내부에 우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2) 우물: 장도를 처음 발굴했을 때 식수원인 우물터가 없어 청해진 본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어 이 우물의 발굴로 청해진 본영임을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우물은 깊이가 6m로 해수면보다 낮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현재도 물이 솟고 있다고 합니다. 장보고 시대에는 청해진 본영 거주자와 이곳을 드나들던 사람, 상인, 군인들의 주요 식수원이었습니다.
(3) 내성문: 이곳이 청해진 본영의 안방 문과 같은 곳이었을 겁니다. 정면에 보이는 마을이 장보고시대에 청해진의 주요 시설이 설치된 장자리입니다.
(4) 고대 : 토성의 동쪽 높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주변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5) 굴립주 : 장도 정상부의 평탄한 곳에 땅을 파고 기둥을 세우거나 박아 그 위에 건물을 지은 흔적입니다. 고대와 같이 주변을 감시하는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입니다.
3) 목책: 목책은 나무를 잘게 떼어 만든 장애물로 나무 울타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흙, 돌로 성을 쌓기 전인 청동기시대에 거주지를 보호하기 위해 목책을 두른 흔적이 충남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도 발견됩니다.
(1) 발굴된 목책: 청해진에서 발굴된 목책의 규모는 장도의 남쪽 해안에서 청해진 본영의 주요 출입구가 있는 서쪽 해안까지 총 331m입니다. 갯벌에 깊이 90cm, 폭 80cm의 구멍을 파고 나무기둥을 잘게 심었습니다. 이러한 목책은 신라의 수도 경주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무역항인 울산 반구대 유적에서도 발굴되었습니다.
(2) 목책의 흔적과 용도?: 장도 남쪽 자갈 갯벌에 노란 깃발과 붉은 깃발이 서 있는 곳이 목책이 발굴된 곳입니다. 장도 남쪽에서 출입구가 있는 서쪽까지 세운 목책은 장도의 청해진 본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었을까. 배를 대기 위한 목제 부두였을까요? 둘 다였을 거라고 추정했네요. 목책 자체가 나무 울타리 역할을 하여 적의 침입을 방어했다는 추정과 배가 접안하기 위한 부두시설을 위해 설치한 나무기둥이라는 추정입니다.아래 사진을 보면 썰물 때인데, 제방까지 바닷물이 고여 있는 것으로 보아 목책은 접안시설을 짓기 위한 기둥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1200년 전인 장보고 시절에는 목책이 있는 장도 남쪽과 주변 해안의 사질 갯벌이 지금보다 좁았는데 갯벌이 계속 성장하면서 장도 주변 바다의 수심이 얕아지면서 지금처럼 썰물 때 목책이 있는 지점이 육지로 노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갯벌의 성장? 수십 년 전에 만든 서해안 간척지 제방 앞에 새롭게 갯벌이 성장하고 있어 이러한 지형적 추정을 가능하게 해줍니다(개인적 견해). 1200년 전 통일신라시대에도 현재의 지형과 동일했다는 생각에서 역사를 해석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지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살아있는 생물 같습니다. 변화하는 시간이 길 뿐입니다.^^
(3) 목책터 확대: 장도의 목책에 사용된 나무는 완도의 최고봉인 상왕산의 소나무를 주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목책의 나무기둥을 촬영한 것으로 연륜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나무기둥의 보존상태가 양호합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은 산소가 차단된 환경이기 때문에 나무가 썩지 않고 1200년을 버틴 것입니다. 바다나 민물의 생물화석은 죽은 생명체가 산소가 다니지 않는 갯벌이나 호수의 진흙층에 묻혀 썩지 않고 보존되어 퇴적암으로 굳어져 형성됩니다.
※ 매듭 : 신라 하대 왕위쟁탈전에 관여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가진 장보고는 왕위쟁탈전에 개입하여 신무왕을 옹립하였으나 자신의 딸을 왕비로 책봉하는 문제로 신라 조정과 충돌하던 중 염장에게 암살당하여 생을 마감합니다. 장보고 사후 신라 조정은 위협적인 존재였던 청해진 지우개에 나서 주민들을 모두 벽골현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을 펴 완도를 무인지대로 만들게 됩니다. 완도에 다시 사람이 거주하게 된 것은 500년 뒤인 14세기(1351년) 고려시대가 되면서부터입니다.당대의 걸출한 인물이었던 장보고 같은 사람을 신라 조정이 품고 잘 활용했다면 신라는 더욱 번영을 누리고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지나간 역사에 가정은 없습니다.^^ 장보고 같은 인물이 왕위 다툼의 혼란 속에서 허무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동아시아 해상 패권까지 넘긴 당시 지배층의 행보가 안타깝습니다.